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의 우경화 (문단 편집) == [[일본 극우사관]], 우익 정치이론, 그리고 [[역사왜곡]] == 2014년 8월 [[아사히 신문]]이 [[일본군 위안부]] 관련 과거 기사 가운데 16건을 오보로 인정하고 취소한 일은 일본 우익들이 전방위적으로 발호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파 성향의 언론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산케이 신문]], [[요미우리 신문]] 등은 잇따라 '[[아사히 신문]]=매국의 DNA'[* 그나마 언론상에서 우파 인물들이 말할수있는 높은 수위의 욕이다. 한술 더 떠서 넷 우익은 아예 '빨갱히(아카히)'나 '아사삐'같은 원색적인 비하어를 쓴다.]와 같은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공격했다.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해 정치인들도 여기에 가세했다. 아사히는 단지 요시다 세이지란 인물의 증언을 토대로 한 기사를 취소했을 뿐인데 이들은 내친김에 위안부 강제 동원 자체를 부정하고 나섰다. 주변국 반발과 여론 악화를 의식해 위안부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河野) 담화를 부정하지는 못하면서도 '고노 담화를 계승하되 검증한다'는 기괴한 논리로 흠집냈다. 위안부를 '군사적 성노예'로 규정하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권고한 유엔 인권위원회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해 철회를 공식 촉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움직임에 미국 의회조사국(CRS)은 '아베 정권이 역사를 들쑤시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민간 차원의 우경화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2010년대부터(더 이르게 잡으면 만화 [[혐한류]]이래) 일본 출판가에 ‘혐한(嫌韓)’ 서적 바람이 분 것은 물론 온라인 중심으로 이뤄졌던 혐한 활동도 오프라인으로 확대됐다. 2009년 7,000명이었던 혐한단체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 일명 [[재특회]]]회원은 지난해 15,000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활동도 점점 과격해져 전직 아사히 신문 기자에 대한 테러 협박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잔학성을 담은 할리우드 영화 <[[언브로큰]]> 관계자([[안젤리나 졸리]]를 비롯한)의 입국을 막기까지 했다. 이에 [[조지프 나이]] 미국 [[하버드 대학교]] 석좌교수는 '''"요즘 일본은 1930년대 일본을 떠올리게 한다"'''고 꼬집었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조지프 나이]]는 단순한 대학 교수가 아니라 국제정치학계의 세계적인 거물학자로 미국 정부의 대외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는 직접 행정부에 참여해서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입안하였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도합 10만 명을 핵심으로 한국과 일본을 미국의 하위 군사동맹국으로 묶어놓고 이 바탕위에서 중국의 해양 진출을 견제하면서 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한다는 '''나이 이니셔티브'''는 지금까지도 미국 정부의 기본 정책이다. 원래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 정권은 재정적자를 이유로 주한미군 전면 철수, 주일미군 대폭 축소로 방향을 정했으나, 클린턴 집권 이후 조지프 나이는 장래에 미국의 유일한 경쟁자가 될만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재정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동아시아 지역에 반드시 거대한 미군을 유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본 우익들은 [[메이지 유신]]부터 일제 패망 직전의 역사를 황금기라고 부르며 그리워 하지만, 정작 일본 경제, 정치, 국방, 외교가 안정되고 중산층이 가장 많이 늘어난 풍요로웠던 시기는 [[일본 제국]] 시대가 아닌 전후 고도 성장기였던 1960년~1990년대이다. 이 시기는 일본이 [[식민지]]가 없고 영토도 축소되었으며 군대도 없음에도 한때나마 미국 경제까지 위협했으며, 오늘날의 일본을 만든 토대가 되었다.[* [[식민지]]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식민지를 확보한 초반이라면 몰라도 후반에는 오히려 식민지를 운영하는데 드는 유지비가 식민지를 통해 얻는 소득보다 한참을 웃돌았으며, 식민지인들의 저항 운동을 진압하거나, 자국의 인재를 식민지에 파견하는 등 식민지 관리하다가 오히려 본국 관리가 소홀해지는 등의 문제로 국가 역량을 약화시켰다. 또한 당시 일본군 군국주의로 미쳐돌아가던 시기였는데 군국주의는 생산활동 없이 소비만 하는 군을 국가 최우선으로 여긴다는 점으로 인해 끊임없이 국가 역량을 소모하며, 이 역량 감소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국민을 전쟁터로 내몰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로 인해 군국주의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부터 1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 쌓았던 근대화의 역량을 전부 날려먹었다. 그리고 미국의 [[역코스]] 전쟁과 연이은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으로 날려먹은 국가 역량을 다시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일본은 정치와 언론 모두 극우가 아니라 [[친미]], [[친한]] 성향의 중도우파가 주도하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아베 신조]]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도 [[친한|친한파]]였다. 그리고 [[헤이세이 시대|헤이세이 오지상]]인 [[오부치 게이조]] 역시 [[친한|친한파]]이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일본 자유민주당도 지방자치 레벨에서는 사회당, 공산당과도 협력하면서 복지를 대폭 강화할 정도로 유연했으며 전반적으로 중도파들이 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까지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일본군이 얼마나 미쳐돌아갔는지를 국민들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고, 고도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던 시기였기에 [[잃어버린 20년]]이 지속되는 지금처럼 국민들의 불만이 쌓일 일이 그닥 없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을 중국과 소련, 북한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인식도 존재했다. 실제로 일본의 우경화가 지속되고 독도 도발이 본격화되던 시기는 잃어버린 10년이 지속되어 잃어버린 20년이 되면서 '이러다 일본이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크게 자리잡던 시기와 일치한다. 거기다 한국이 한강의 기적이라는,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하는 전대미문의 성장을 보여주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GNP의 역전이 일어나고, 삼성이 소니를 잡는 등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일본인들의 불안감은 더욱 가중되면서 우경화가 촉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